소설 | 답장줘.
안녕 잘 있니? 오랜만에 연락해서 놀랐지? 그것도 문자도 전화도 아니라서 더 놀랐을지도 모르겠다. 편지라니 요즘같이 바로바로 연락이 가능한 시대에 하루 이틀이 걸려서 도착하는 말들에 지루함만 가득할지 모르겠어. 근데 나는 오히려 이렇게 장문의 편지를 주는 게 더 좋기도 해. 전화나 문자로는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느라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까먹을 때가 종종 있거든. 그래서 정말 꼭 말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편지가 더 좋아. 좀 독단적이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 이야기를 잔뜩 써 내려가면 속 시원한 것도 있어. 평소에는 남 이야기 듣는 게 더 편해서 듣는 위치지만 어떨 때는 내 이야기를 잔뜩 하고 싶기도 하니까 말이야.
내가 한동안 너한테 이상하게 굴었던 시기가 있었던 거 기억나? 사실 그때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었어.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그때야말로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생겨서 힘들었거든.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왜 고통스럽고 힘들었냐고? 너도 알지. 내가 프로짝사랑러라는거. 짝사랑이란 건 내게는 꽃가루가 날리면 찾아오는 알레르기성 비염처럼 매해 어디 가서 사라지지도 않고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그게 그때 찾아온 거야. 근데 그게 사실은 전에도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오랫동안 잠잠하다가 갑자기 불어온 돌풍처럼 날 덮쳤어. 왜 갑자기 그렇게 찾아왔던 걸까? 내가 걔한테, 걔가 나한테 뭘 한 것도 없었어. 언제부터 얘를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지? 정말 평범했던 일상 속에서 대체 언제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수가 없어.
단순한 걱정에서부터 시작됐던 거 같아. 총 세 명이 같이 놀던 때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애인이 생겨버린 거야. 그래서 우리랑 노는 게 소원해졌고, 남은 우리 둘은 아쉬워했지. 언제는 한번 둘이서 대화를 하는데 갑자기 걔가 그러는 거야. “왜 너도 애인 생겼어?”라고.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부인을 했는데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. 얘가 애인이 생기면 어떡하지? 라는 걱정이 생긴 건. 물론 너도 알다시피 난 그때 애인이 없었어. 이제 둘 중에 한 명이 애인이 생기면 남은 한 명이 정말로 혼. 자. 놀아야 했으니까 서로 애인 생기는지 긴장 아닌 긴장을 했던 거 같아.
그러다가 걔가 회식으로 인해 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았던 날이 있었는데 그게 신경이 쓰였어. 걔도 성인이니까 어련히 집에 잘 들어가겠거니 라고 생각하면 될 일인데 그땐 정말 신경이 쓰이는 걸 넘어서 걱정까지 됐다니까. 전화밖에 못 하는 내가 너무 싫더라고. 심지어 걔랑 같이 회식할 사람들에게 괜한 질투가 났지 뭐야. 진짜 이상하지. 나 그때 생각했어. 이건 친구가 늦게 들어가서 생기는 걱정이 아니라는걸. 그리고 잊고 있던 게 생각난 거야. 아. 나 옛날에 얘 좋아했었지.
난 걔를 처음 만났던 때가 기억나. 난 친구 기숙사에 놀러 와서 침대에 앉아있었고, 다른 친구가 걔를 데리고 왔어. 그렇게 기숙사 작은 방안에서 나는 침대에서, 걔는 바닥에서 서로를 쳐다봤어. 그 장면이 기억나. 그때 나는 알았을까? 걔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걸.
네가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, 나 대학생 때 편입을 준비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어. 그때 얼마 안 가서 포기했었는데 그 이유가 편입하면 걔를 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고 놓치기 싫었어. 그때 나는 나대로 걔는 걔대로 바쁜 대학생의 삶을 사느라 같이 무언가를 할 수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아쉽고 헤어지기 싫었던 거야. 내가 걔와 같은 학교, 과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게 눈에 훤했거든.
사실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과에 좋아하는 동기가 있다고 말했었어. 내 커밍아웃을 들은 애들은 그 상대가 누구인지 추궁을 했고, 한 명씩 호명되는 동기들 이름에 계속 아니라고만 하는게 지루했는지 아니면 내 짝사랑의 상대가 자신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명을 그만뒀는지 모를 일이야. 근데 그때 좋아했던 그 동기는 바로 지금 말하고 있는 걔였어.
대학생 때 만취된 상태로 짝사랑하던 선배에 대해서 구구절절 떠들던 그때나 내가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나 같이 다니던 선배가 고백해서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도 헤어진 사실도 모두 걔한테 다 말했었어. 그럼 내가 걔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걔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? 넌 어떻게 생각해?
걔를 하루라도 못 보면 애달파서 전화했고, 카톡은 시답지 않은 말이라도 하면서 계속 이어나갔어. 너도 알다시피 나 선톡을 잘 안 하는데 걔한테는 무조건 하게 되더라고. 무조건 칼답. 무조건 우선 답장.
혼자 여행 가는 건 선호하지만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는데 걔를 보기 위해서는 그냥 아무 일 없어도 멀리 있는 걔를 보러 가게 되더라고.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?
아 미안 나 너무 사랑 이야기만 했다. 조금만 참아줘. 이야기 얼마 남지 않았어. 조금만 힘내주라. 맨날 걔랑 하는 통화를 내 일정으로 못하게 되었는데 그때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. 글쎄. 허벌 눈물인데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? 싶을 정도로 슬픔과 불안이 몰려오는 거야. 그래서 불안장애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글로도 썼거든. 잠깐 생긴 시간에 걔랑 통화했는데 그렇게 기대고 싶을 수가 없더라. 옆에 있었다면 꽉 안아서 숨을 못 쉬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어. 근데 문득 내가 걔한테 이토록 기대면서 안정감을 느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게 평생 그렇다면 얼마나 걔가 힘들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어.
내 짝사랑은 기간이 꽤 짧아서 이번 짝사랑도 금방 식어 보잘것없이 너덜거려 질릴 줄 알았어. 근데 벌써 1년이 다 되어가. 아니 그래서 고백은 해봤냐고? 프로짝사랑답게 고백을 우습게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나름 했다고 생각하는데 걔는 그냥 장난으로 받아들여졌나 봐. 정말 나 여러 차례 나 너 좋아한다. 사랑한다. 말했는데 내 말에 신뢰성이 없는지 아니면 믿기 싫은 것인지 그냥저냥 모른 척하듯 지나 가버렸어. 어떨 땐 코웃음도 칠 때도 있는데 웃긴 게 그런 게 밉지가 않았어.
걔가 우리 사이를 친구라고 명명할 때, 걔가 호감 있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내 마음이 자꾸 아려왔어. 마치 너와 나는 친구 그 이상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걸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. 그럴 때마다 걔를 연애 상대로 보고 있는 내가 너무 죄스럽게 느껴졌고, 금단을 어기는 것 같았어.
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며 걔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고 소개팅 앱도 깔고 연락도 해봤는데 모르는 사람과의 연애는 정말 쉽지가 않더라. 그래서 바로 지워버렸어. 가슴 찢어지더라도 나는 오로지 걔였던 거 같아.
아이고야. 벌써 편지가 너무 길어졌다. 그리고 심지어 너 사랑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하잖아. 너 영화 볼 때도 로맨스 같은 거 안보고 호러, 스릴러, 범죄, SF 이런 것만 보는데 내가 너무 내 사랑 이야기만 계속 주야장천 했나 봐. 아무튼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예상이 돼? 걔 이름만 쏙 빼고 계속 얘기했는데 혹시 예상가는 인물이 있어? 꼭 답장 줘. 기다릴게.
P.S.
아 맞다. 얼마 전에 핸드폰 사진첩을 무료하게 보다가 네가 나를 찍어준 사진을 보게 되었어. 여행지에서 돌아와 사진을 정리할 때도 봤던 사진인데 한 달 정도가 지난 지금에서야 사진을 다시 봤어. 중간중간에 사용할 사진이 있나 살펴보긴 했어도 정리할 때 봤을 땐 영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진이어서 미안하지만, 눈길을 잘 안 줬어. 근데 지금 와서 다시 보니까 그 사진이 너무 좋은 거야. 같은 피사체를 찍어도 찍는 사람의 눈으로 본 걸 찍는 거라 그 사람이 피사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나와 있다고 생각하니까 네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느껴지더라고. 네가 바라본 내 모습은 항상 장난꾸러기다운 모습으로 찍혀있었어. 한편으로는 사랑스럽기도 했다고 하면 네가 웃을까? 내가 찍은 너의 모습은 너에게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